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눈을 감은 그대로 깊은 어둠 속에 삼켜져 더이상 떠오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생한 장면들은 이따금 유쾌하지 않은 꿈으로 연결되곤 하는데, 조금 지나칠 때는 온몸이 식은땀에 뒤덮이기도 한다.

그런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 침실을 나설 때의 마음은 참으로 고요하다. 나 외의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배경 속에서 그저 한걸음 한걸음 발을 움직일 뿐인 그 한때의 고독감이 좋다.

하지만 오늘은 그리 되지는 않을 모양이다. 땀을 씻어 내리기 위해 욕실로 향하는 내 귓가에 경찰차의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타이밍이 거지같네. 속으로 중얼거리고 발길을 돌려 욕실이 아닌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생수 한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심하게 갈증이 났다. 좋은 징조는 아닌데.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난폭하게 문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는 경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포위됐댄다. 사람 몇명 집 주변에 배치해 둔 것 가지고 꽤나 요란법석이네. 일부러 저항할 생각은 없다. 

비어버린 패트병을 쓰레기통에 쑤셔넣고 잠시 거울 앞에 섰다. 거울속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변함없이 텅 비어있다. 도대체 네 속엔 뭐가 있는거냐.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질문을 오늘도 던졌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자 계속 들려오던 둔탁한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쾅쾅쾅. 슬리퍼를 신고 문 손잡이 앞에 섰다.

자, 이제. 얼마 동안의 이별일까.

 

* * *

 

익숙한 일이었다. 신체적인 폭력이 없다는 것은 천국이나 다름없었고. 아무리 견딜 수 있었다지만 스트레스는 받았으니까. 그 짜증나는 고문들에 반해 지금 받는 취조는 상당히 인간적이었다. 나 같은 놈한테도 지켜야 하는 인권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나.

어지럽게 움직이는 상대방의 입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오랜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 아니지 아니야, 오랜 추억은 아니다.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심리적으로는 이미 10년쯤 지난 일들인 것 같다. 이제 감정도 퇴색 됐고 그때 주고받던 말들도 빛이 바랬다. 기억 속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희미했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들의 순서가 일정하지 않았다.

"계속 이럴거야?"

큰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눈앞의 경찰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무슨 말씀을 하셨죠?"

"계속 이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앉아만 있을 거냐고! 이미 결론 난 일이야. 포기하고 자백해!"

나는 2초 정도의 뜸을 들이고 말 대신 웃음으로 답했다. 경찰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거무튀튀한 감정들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장난이 너무 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여기 외국에서 오신 분도 계시죠?"

"뭐라고?"

"분명 이름이 …샤본 어쩌고 였던 것 같은데."

그의 안색이 변했다.

"그 분 불러주세요. 그 분과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또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매직윈도우 너머 나를 지켜보고 있을 사람한테. 경찰은 문을 열고 그 너머로 갔다.

다시 문이 열린 건 1분이 채 안되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날 찾았다고?"

"몰랐던 것 처럼 말씀하시네요. 다 보고 계셨으면서."

"왜지?"

"글쎄요. 오랜만에 당신 얼굴이 보고싶었나보죠."

"그거 말고. 왜 갑자기 잡힌거냐고."

"그야 제가 실수를 했고 유능한 경찰 분들이 그걸 놓치지 않은 거겠죠? 그렇게 찾은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까 제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는 거 아닌가요?"

"나랑 농담따먹기 할 생각 하지마. 왜냐고 묻잖아. 이때까지 완벽하게 빠져나갔으면서 갑자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실수나 하고 말이야. 이건 거의 자수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 이유를 말해."

"저도 사람이니까…"

"실수 할 수도 있죠, 같은 말 하면 죽여버린다."

"…형사가 그런 말 해도 돼요? 그보다 한국말 진짜 많이 느셨네요. 죽여버린다니."

끅끅 거리면서 웃고 있으니 샤본이 나를 노려봤다. 나는 사과의 표시로 수갑으로 묶인 손바닥을 올려보이고는 헛기침을 몇번 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왜라고 생각해요?"

샤본은 들어와서 앉았을 때부터 줄곧 코트 주머니에 넣고있던 손을 빼서 철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본 적은 있어. 하지만 전부 폐기했지. 말도 안되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또 생각이 바뀌네. 너라면 가능할 것 같아."

"소설 같은 이야기라구요?"

"그래. 내가 모은 자료들을 연결 해봤을 때 나온 결론."

"그거 궁금하네요. 뭔데요?"

샤본은 잠시 고민했다. 매직윈도우를 흘끔 쳐다보았다. 아마 동료에게 말했다가 말도 안된다는 소리를 듣고 미친놈 취급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지, 이제와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알 바 아니라는 사고방식을 바꾸실 리는 없고, 단지 수사 과정에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걸 걱정하는지도 모른다.

"네가 …정말 오랜 세월 살아왔다는 것."

"뭐라구요?"

"신문을 봤어. 20세기 초반에 나온. 한 번 실렸을 뿐이지만 얼굴 사진이 있었지. 존 캐셔. 너 맞지?"

나는 책상 모서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더 있어. 존 캐셔 말고도, 해리엇 데이먼드, 하타케 코토부키, 즈이헬롭스키, 앨리엇 페이먼. 그 외에도 다섯명. 전부 너 맞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확인한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건 1836년의 기사였어. 전부 범죄자 검거 기사였지. 넌 항상 악질적인 범행으로 두려움을 사다가 어이없는 이유로 경찰에 검거되곤 했어.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이 그때와 같은 상황인 거겠지.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넌 적어도 1836년부터 지금까지 쭉 살아온 거야."

단숨에 말을 쏟아낸 샤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말하게 될 날이 올줄은 몰랐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나는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그에게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제와서 그 대답을 바꾸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선택지를 고르라면 너무도 뻔했다.

"말도 안돼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안되니까."

"조금 더 그럴듯한 추측을 해보시라구요."

"그렇게 말 할 줄 알았어."

그는 다시 자신의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이유를 알려줄 생각이 없다면 난 너랑 이야기 하고싶지 않은데. 돌아가도 되나?"

"성격도 급하셔라. 제가 언제 알려주지 않겠다고 그랬어요?"

"그럼 뭔데? 갑자기 붙잡힌 이유가."

클라이막스였다. 그와 이야기하는 것도 아마 이게 마지막이 되겠지. 평소엔 그렇게 귀찮았는데 지금은 아쉽기까지 하다. 하긴, 미운 정도 정이라고들 말 하니.

"한 가지 이야기의 결말이기 때문에요."

"뭐?"

"이제 됐죠? 이유를 알려드렸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조금 전의 경찰 분을 불러주세요. 범행에 대해서 자백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말이냐고!"

샤본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조금 전의 경찰 분을 불러주세요."

그는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서서히 풀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울렸다.

"한 가지만 알려줘."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 진짜 이름은 뭐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세운 가설을 상당히 신용하는 듯 했다. 내 신원은 조사해봤을텐데. 그 신원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으시네. 제 이름은 김사혁이에요. 제가 김사혁이 아니었던 적은 없어요."

샤본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말 없이 취조실 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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